목회자료실
양을향한마음,마9;35~38,060723
2006-07-21 18:50:14
관리자
조회수 32
목자 없는 양을 향한 마음 : 마 9:35-9:38
1. 예수님은 교육, 전도, 치유의 사역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셨다.
사람들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인생 최고의 성공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어떤 성공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성공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상 모든 목적 성취들을 의미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생의 모든 목적 성취들이 우리에게 평강과 자유를 주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행복한 삶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우리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고, 알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천국 사역을 행하신 결과입니다. 우리의 망령된 행위와 무시하는 태도와 발길질하는 구박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고쳐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감당해 주신 주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마 9:35은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그 사역을 정리해 주십니다. 마 4:23에서도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세 가지 사역은 공생애 초기사역부터 계속 이어지는 사역입니다.
첫째는,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라고 표현된 교육사역입니다. 그 장소는 회당입니다.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의 주권 속에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당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고, 율법 속에 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아는 주권자의 다스림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주권자와 주권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 주권의 다스림에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아는 것과 그 주권의 다스림을 받는 삶은 별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를 자신을 위하여 내세울 뿐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주장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추종하는 신앙의 대상일 뿐입니다. 자신이 그 주권의 다스림을 따라 살아가야 할 존재로서의 모습은 상실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에 모여든 그들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통치 구조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표현된 전도사역입니다. 회당에 모여든 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고자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그 다스림을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율법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천국 백성의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율법이 아닌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셋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표현된 치유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구조 속에 들어가고, 복음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을 능력을 회복하였을지라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병이나 약함으로 인하여 죽은 자처럼 누워있다면 다스림을 받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통하여 영육간에 강건한 자로 세상에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사역을 통해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은혜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예수님의 이러한 삼중 사역의 포기하지 않은 열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인생들을 민망히 여기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열심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의 역사입니다. 마 9:36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찾아가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료하셔서 목자를 알고, 목자를 보며, 목자를 따라가는 순종하는 양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주권자를 알고 주권자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이 그 다스림 속에 있지 못합니다. 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나름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사람들의 인생길들을 모두 하나의 화폭에 그린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아마도 그 그림은 참으로 어지러운 그림이 될 것입니다. 시작도 다르고, 끝도 다른, 서로 얽히고설킨 혼돈의 그림일 것입니다. 그 그림에는 일정한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혼돈의 세상 속에 묻혀버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보일 것입니다.
만일 인생을 이끄는 어떤 유능한 목자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이었다면 모든 인생의 선들이 한 방향을 향해 나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인생들의 모습은 결코 나란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나란하거나, 동일한 지점에서 끝나는 경우들을 목격할 수는 있겠으나 인생의 선들 전체가 나란한 것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어떤 인도자도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자신이 스스로 목자가 되어 살아가는 목자 없는 교만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기대했던 인생은 그러한 인생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양들처럼 목자를 따라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펼쳐진 양의 길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생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만나는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나란하게 펼쳐진 수많은 양의 길들입니다. 황량한 사막의 산과 골짜기마다 자를 대고 그어놓은 것과 같이 나란하게 그어진 양의 길들은 인간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도전을 주는 장면들입니다.
광야에 그어진 양의 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모두 나란합니다. 뒤엉키거나 어긋난 길을 찾기 힘듭니다. 한 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한 쪽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평행선의 세상입니다. 그 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는 낭떠러지와 함정에 빠지는 위험지역을 통과하지만, 모든 양들이 목자를 따라서 나란하게 순종하며 걸었던 승리의 흔적이며,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모습입니다. 목자를 따라 순종의 길을 걷는 양들의 승리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그러한 흔적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며 민 27:17에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를 아는 자들은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 9:36에서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자유가 아닌 고생을 맞이합니다.
“고생하며(에스쿨메노이)”라는 단어는 “가죽이 벗겨지다”라는 강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강탈당하여 완전히 탈진하고 지쳐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자 없는 인생은 “자유”라는 허울 속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는 탈진하는 인생입니다. “유리하는(에리메노이)”이라는 단어는 “던지다, 팽개치다”의 뜻으로서, “던져져서 완전히 무기력하여 버려진 채로 누워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버려진 존재의 모습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지형에서 “목자 없는 양”은 언제나 생사의 기로에 놓여져 있는 양입니다. 서쪽의 지중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며 해안 평야지대, 중앙 산악지대, 요단 계곡, 트랜스 요르단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평균 500m의 중앙 산악지대의 초목지대에서 양들이 풀을 뜯습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 놓여진 양들은 목자 없이 귀가할 수 없습니다. 그들 앞에는 각종 사고의 위험지대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목자를 따라서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귀가 중에 생명을 잃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존재임을 모르며,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목자 없는 양으로서 버림 받아 탈진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유”라는 허울만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존재”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세상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을 대하는 마음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민망히 여기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3. 목자 없는 양을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가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목자 없는 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의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첫 마음은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뿐입니다. 그들이 참된 목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는 모습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함께한 모든 제자들에게도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민망히(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마음으로서, 다른 사람과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느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자신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는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과 같은 정죄의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목자 없는 양들은 민망히 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보여 주신 이유는, 제자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된 우리들이 그 마음으로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하여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지식으로 아는 것만을 믿음으로 여기는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경험해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책망을 듣기만 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민망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다가 예수님의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알고, 그 다스림에 순종하며 행함으로 아는 자들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알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공동체의 중심에는 교육으로 도전을 주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외곽에는 치유의 역사로 소문을 내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고 좇는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고 좇는 무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거점과 외부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즉 대상에 따라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의 순서를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사역의 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삼중 사역을 통하여 “거룩한 교회”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교육, 전도, 치유사역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 존재의 중심입니다. 교회 내적으로는 모든 기관의 중심이 교육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온 자가 가르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 전도, 치유의 은혜는 멀어집니다.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사역이 없는 곳에는 전도와 치유 사역이 어렵습니다.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은혜 입은 자들에게 목자 없는 양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무리를 보시고”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몰려 든 그 무리들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사역 대상인 무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니”란 그 무리들을 향해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마음을 함께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함께 읽고 보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교육, 전도, 치유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살아가는 자는 그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는 무리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육, 전도, 치유 사역을 맡기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읽은 제자들에게 일군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가 곡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일군은 적으니”란 “교육, 전도, 치유”의 사역을 통해 양들을 이끌 자가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일군을 세우시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알고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목자 없는 양들에게 나누어 줄 일군을 부르십니다.
1. 예수님은 교육, 전도, 치유의 사역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셨다.
사람들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인생 최고의 성공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어떤 성공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성공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상 모든 목적 성취들을 의미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생의 모든 목적 성취들이 우리에게 평강과 자유를 주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행복한 삶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우리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고, 알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천국 사역을 행하신 결과입니다. 우리의 망령된 행위와 무시하는 태도와 발길질하는 구박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고쳐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감당해 주신 주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마 9:35은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그 사역을 정리해 주십니다. 마 4:23에서도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세 가지 사역은 공생애 초기사역부터 계속 이어지는 사역입니다.
첫째는,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라고 표현된 교육사역입니다. 그 장소는 회당입니다.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의 주권 속에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당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고, 율법 속에 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아는 주권자의 다스림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주권자와 주권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 주권의 다스림에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아는 것과 그 주권의 다스림을 받는 삶은 별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를 자신을 위하여 내세울 뿐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주장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추종하는 신앙의 대상일 뿐입니다. 자신이 그 주권의 다스림을 따라 살아가야 할 존재로서의 모습은 상실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에 모여든 그들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통치 구조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표현된 전도사역입니다. 회당에 모여든 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고자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그 다스림을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율법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천국 백성의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율법이 아닌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셋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표현된 치유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구조 속에 들어가고, 복음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을 능력을 회복하였을지라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병이나 약함으로 인하여 죽은 자처럼 누워있다면 다스림을 받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통하여 영육간에 강건한 자로 세상에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사역을 통해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은혜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예수님의 이러한 삼중 사역의 포기하지 않은 열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인생들을 민망히 여기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열심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의 역사입니다. 마 9:36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찾아가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료하셔서 목자를 알고, 목자를 보며, 목자를 따라가는 순종하는 양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주권자를 알고 주권자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이 그 다스림 속에 있지 못합니다. 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나름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사람들의 인생길들을 모두 하나의 화폭에 그린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아마도 그 그림은 참으로 어지러운 그림이 될 것입니다. 시작도 다르고, 끝도 다른, 서로 얽히고설킨 혼돈의 그림일 것입니다. 그 그림에는 일정한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혼돈의 세상 속에 묻혀버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보일 것입니다.
만일 인생을 이끄는 어떤 유능한 목자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이었다면 모든 인생의 선들이 한 방향을 향해 나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인생들의 모습은 결코 나란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나란하거나, 동일한 지점에서 끝나는 경우들을 목격할 수는 있겠으나 인생의 선들 전체가 나란한 것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어떤 인도자도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자신이 스스로 목자가 되어 살아가는 목자 없는 교만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기대했던 인생은 그러한 인생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양들처럼 목자를 따라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펼쳐진 양의 길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생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만나는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나란하게 펼쳐진 수많은 양의 길들입니다. 황량한 사막의 산과 골짜기마다 자를 대고 그어놓은 것과 같이 나란하게 그어진 양의 길들은 인간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도전을 주는 장면들입니다.
광야에 그어진 양의 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모두 나란합니다. 뒤엉키거나 어긋난 길을 찾기 힘듭니다. 한 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한 쪽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평행선의 세상입니다. 그 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는 낭떠러지와 함정에 빠지는 위험지역을 통과하지만, 모든 양들이 목자를 따라서 나란하게 순종하며 걸었던 승리의 흔적이며,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모습입니다. 목자를 따라 순종의 길을 걷는 양들의 승리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그러한 흔적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며 민 27:17에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를 아는 자들은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 9:36에서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자유가 아닌 고생을 맞이합니다.
“고생하며(에스쿨메노이)”라는 단어는 “가죽이 벗겨지다”라는 강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강탈당하여 완전히 탈진하고 지쳐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자 없는 인생은 “자유”라는 허울 속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는 탈진하는 인생입니다. “유리하는(에리메노이)”이라는 단어는 “던지다, 팽개치다”의 뜻으로서, “던져져서 완전히 무기력하여 버려진 채로 누워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버려진 존재의 모습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지형에서 “목자 없는 양”은 언제나 생사의 기로에 놓여져 있는 양입니다. 서쪽의 지중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며 해안 평야지대, 중앙 산악지대, 요단 계곡, 트랜스 요르단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평균 500m의 중앙 산악지대의 초목지대에서 양들이 풀을 뜯습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 놓여진 양들은 목자 없이 귀가할 수 없습니다. 그들 앞에는 각종 사고의 위험지대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목자를 따라서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귀가 중에 생명을 잃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존재임을 모르며,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목자 없는 양으로서 버림 받아 탈진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유”라는 허울만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존재”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세상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을 대하는 마음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민망히 여기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3. 목자 없는 양을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가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목자 없는 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의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첫 마음은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뿐입니다. 그들이 참된 목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는 모습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함께한 모든 제자들에게도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민망히(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마음으로서, 다른 사람과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느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자신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는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과 같은 정죄의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목자 없는 양들은 민망히 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보여 주신 이유는, 제자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된 우리들이 그 마음으로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하여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지식으로 아는 것만을 믿음으로 여기는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경험해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책망을 듣기만 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민망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다가 예수님의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알고, 그 다스림에 순종하며 행함으로 아는 자들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알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공동체의 중심에는 교육으로 도전을 주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외곽에는 치유의 역사로 소문을 내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고 좇는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고 좇는 무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거점과 외부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즉 대상에 따라 교육과 선포와 치유 사역의 순서를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사역의 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삼중 사역을 통하여 “거룩한 교회”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교육, 전도, 치유사역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 존재의 중심입니다. 교회 내적으로는 모든 기관의 중심이 교육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온 자가 가르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 전도, 치유의 은혜는 멀어집니다.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사역이 없는 곳에는 전도와 치유 사역이 어렵습니다.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은혜 입은 자들에게 목자 없는 양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무리를 보시고”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몰려 든 그 무리들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사역 대상인 무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니”란 그 무리들을 향해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마음을 함께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함께 읽고 보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교육, 전도, 치유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살아가는 자는 그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는 무리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육, 전도, 치유 사역을 맡기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읽은 제자들에게 일군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가 곡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일군은 적으니”란 “교육, 전도, 치유”의 사역을 통해 양들을 이끌 자가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일군을 세우시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알고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목자 없는 양들에게 나누어 줄 일군을 부르십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29 | 설날 가정예배순서 | 관리자 | 2006-01-27 | 46 | |
28 | 사랑을 아는믿음,요일4;13~21 | 관리자 | 2006-02-25 | 31 | |
27 | 설교예화-경건한 말 | 관리자 | 2006-03-31 | 29 | |
26 | 마른떡 한조각을 가지고도...잠언17;1~ | 관리자 | 2006-05-23 | 27 | |
25 | 성경의 남자이해, 에베소서 5;22~24 | 관리자 | 2006-05-23 | 26 | |
24 | 교회와 부부의 신비 | 관리자 | 2006-05-28 | 27 | |
23 | 성령받은삼천명 | 관리자 | 2006-06-27 | 31 | |
22 | 최고의선물용서,엡4;32,060618 | 관리자 | 2006-06-27 | 29 | |
21 | 자기사랑확증,롬5;8, | 관리자 | 2006-06-27 | 31 | |
20 | 마음의노래를회복,사43;14~21,060618 | 관리자 | 2006-06-27 | 29 | |
19 | 너는 내것이라,사43;1,060702 | 관리자 | 2006-07-14 | 29 | |
18 | 견고한 믿음,고전15;57~58.060709 | 관리자 | 2006-07-14 | 24 | |
17 | 소산의맏물,신26;1~11, 060716 | 관리자 | 2006-07-14 | 27 | |
16 | 양을향한마음,마9;35~38,060723 | 관리자 | 2006-07-21 | 32 | |
15 | 영적인낙원회복,창2;8~17,060730 | 관리자 | 2006-08-28 | 30 |
1
2
댓글